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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현의 택견이야기 아홉] 잘못된 택견의 문화재 지정

결련택견협회
2020-06-05 15:21 | 2,418

택견의 큰 어른 두 분인 고 송덕기옹(우측)과 고 신한승선생(좌측)이 댓님을 메는 모습

 

택견은 국내에서 무술로서는 유일하게 ‘중요무형문화재 제 76호로 지정(1983)’되어 있는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무예이다. 그러나 지정 당시 우리 무예에 대한 정보와 인식의 부족으로 택견의 원형과는 상당 부분 다르게 문화재로 지정되고 말았다.

전통의 무형(無形)문화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발전해 온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것을 원형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일이다. 다만 무형문화재로 지정할 때는 그것이 발견된 시점(時點)을 기준으로 그때 행해지고 있는 형태를 원형으로 하여 문화재로 지정을 한다.

그렇다면 당시 문화재보고서에도 나와 있듯이 ‘우리나라 전통 택견의 살아있는 유일한 실연자이며 고증자인 송덕기 옹’의 택견을 원형으로 하는 것이 문화재 행정상 가장 합리적인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문화재로 지정된 신한승 선생의 택견은 송 옹의 원형택견과는 다른 모습으로 보존되어 보급되고 있어 안타까운 실정이다.

문화재 지정 당시 문화재조사보고서에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현재 실행되고 있는 신한승 선생에 의한 문화재택견과 송덕기옹의 원형택견과의 차이점을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해 보았다.

첫째로 택견의 전승지역에 관한 문제다.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사료(史料)나 고로(古老)들의 증언에 의하면 택견은 서울지역 일대에서만 발견되어 지고 있는 서울의 고유한 지방문화이다. 다른 지역에도 택견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정확한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주장마저도 서울과 같이 대대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택견 고수가 있었다’라는 정도의 한 개인에 관한 것이다. 서울에서 택견을 배운 사람이 지방으로 이사를 갔을 수도 있고 혹 실제로 서울 지역 외에 택견이 존재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현재까지는 택견에 대한 자료나 전해져 오는 이름난 택견꾼들에 대한 기록이 거의 대부분 서울지역에 국한되어 있다.

설령 택견이 서울만의 지역문화가 아니라고 백보양보를 하더라도 택견의 문화재지정을 이루어낸 신한승 선생이 충주(忠州)에서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택견에 대한 기록이 전무한 충북 일대가 택견의 본고장으로 되어 있는 것은 택견 문화재지정의 시작부터가 잘못된 일이라 하겠다.

사실 월드컵에서 우승하면 그만이지 축구의 종주국이 영국이든 브라질이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그러나 모든 무형문화재는 진주검무(제12호), 안동차전놀이(24호), 송파산대놀이(제49호) 등과 같이 반드시 전승계보와 더불어 전승지역이 확실히 밝혀져 있다. 따라서 택견의 전승지역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우리무예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원형택견과는 다르게 만들어진 수련체계에 관한 문제이다. 송덕기 옹에 의해 전승된 택견은 경기 중심의 겨루기 무예로 낱개기술의 반복적인 수련으로 실전력을 높이도록 되어 있다. 국내의 씨름은 물론이고 복싱이나 무예타이, 유도 등 경기 중심의 무예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 선생은 이것을 투로(鬪路, 태권도의 품새, 가라데의 型, 우슈의 拳法 같은 것) 중심의 무술을 모델로 ‘본때뵈기 12마당’이라는 새로운 택견 품새를 창안하여 택견의 수련체계를 바꾸었다. 어떤 수련방법이 더 좋은가를 떠나 경기 중심의 택견 수련체계가 바뀌어버린 셈이다.

세 번째는 택견에 ‘동, 째’라는 명칭의 등급제도(타 무도의 段, 級과 같은 것)를 도입함으로써 민중(民衆) 중심으로 자유롭게 발전되어 온 택견의 기본철학이 희석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사무라이 중심의 무도문화는 철저한 서열의식에 의한 등급제도를 바탕으로 상하를 구별하지만 민중에 의해 이어져 내려온 택견은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있을지언정 특별한 계급제도는 없었다. 마을 단위로 이루어지는 민속경기로 동네 어른이나 형들에게 배우는 민중의 기예였기 때문에 누가 누구에게 ‘라이센스’를 주고 말고 할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현대화라는 명분의 택견의 등급제도 도입은 택견의 민중의식과는 대치가 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송덕기 옹에 의해 전승된 택견은 그 자체가 이미 경기인데 신 선생은 경기형태의 ‘서기택견’과 싸움으로 하는 ‘결연택견’이라는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새로운 명칭을 만들어 택견을 분류하였다. 이것은 다분히 신 선생 개인의 의견이므로 역사에 없던 것을 문화재로 지정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충주택견과 원형택견이 다른 다섯 가지 이유

 

송덕기옹과 신한승선생의 견주기 시연 모습(1983)

 

끝으로 필자가 지난 연재 ‘택견이야기 일곱’에서 이미 밝혔듯이 신 선생의 문화재택견과 송 옹의 원형택견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거리 개념의 유무이다. 문화재택견은 일정하게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다는 원형택견의 기본적인 경기규칙을 간과함으로써 택견의 동작들이 많이 바뀌고 말았다. 바뀐 경기규칙에 맞게 기술과 동작들이 적응하여 바뀔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두 택견 사이에는 커다란 괴리감이 생기게 된 것이다.

택견 수련생들에게 동기부여를 유발하기 위해 등급제도를 만들고 용이하게 잘 지도하기 위해 택견품새를 만든 신 선생의 노력이 결과적으로 택견을 현대적이고 과학적으로 발전시킨 것인지 아닌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일이다. 필자는 대선배이신 신 선생 택견의 가치를 감히 평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원형택견과는 다르게 정리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근래까지 송덕기옹 외에 더 많은 택견꾼이 존재했을 수도 있고 타 지역에도 택견이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그것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조사하고 연구되어야 하겠지만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의 택견은 분명 서울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어 온 송덕기옹의 택견이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신한승 선생에 의해 문화재로 지정된 택견은 그것의 우열과는 상관없이 송덕기옹의 택견과는 분명히 다르며 그렇기 때문에 택견의 문화재 지정은 잘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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